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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교과에는 나오지 않는 교과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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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은영 통신원 [email protected] 입력 2023.07.27 08: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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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은영의 ‘헬라어로 읽는 에베소서 특징’ (2)
에베소서를 연구하고 묵상하며 우리는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더 큰 은혜와 이해 속에 체험하게 된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를 기록할 때 투옥 중이었지만, 그 안에서도 하나님을 더 크게 보는 경험을 했던 것 같습니다. 에베소서를 적은 시기가 1차로 로마 감옥 안에 있던 중이라 하지만, 사도행전은 바울이 로마 감옥으로 이송되기 몇 해 전, 예루살렘에서부터 갇힌 신세가 되어 있었다고 기술합니다. 


그러나 그는 그런 상황에서도 감옥의 크기나 인간이 주는 특권의 적음이나 사람이 자신에게 갖는 견해의 크기에 매몰되지 않았던 것이 분명합니다. 그의 생각은 자신이 이해할 수 있는 최대한의 영역까지 거슬러 올라가 창세 전부터(1:4) 세말까지(1:9) 존재하시며 뜻을 펼치시는 하나님의 웅대하심을 목격했습니다. 


감옥에서 찬양받기에 마땅하신 하나님을 묵상하고, 하나님으로 인해 얻게 되는 축복과 특권을 깊이, 더 깊이 깨달으면서 성도들도 자신과 같은 경험을 하길 직접적으로 촉구하고 기원합니다(엡 1:8-9, 16-19; 3:14-19; 4:13; 5:17 등). 만약 자신이 경험하지 않았다면 이런 소원과 기도가 당당히 나올 수 없었을 것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너희 마음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이 무엇이며, 그의 힘의 강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떤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1:17-20). 


이 얼마나 강력한 간증이며 아름다운 기도입니까? 그는 공상주의나 비현실적인 이상주의에 빠져 있던 것이 아닙니다. 자신의 처지와 현실을 직시하면서도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면서 선택한 그 길의 목적을 잊지 않았던 것이 분명합니다(행 20:24). 


그는 ‘가질 수 없으나 가질 수 있는 것’ 바로 소망과 자신을 가두고 있는 권세들 위에 뛰어난 하나님의 강력한 능력에 대한 확신을 키워갔습니다. 비록 몸은 갇혀 있었을지라도 삶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풍성함을 누렸으며, 정신은 하늘 높은 곳으로 속해 고양됐습니다(3, 20절).


<주해 복음성경>에서 가장 먼저 등장하는 에베소서에 대한 화잇 부인의 주석은 다음과 같습니다. 


“에베소 1장 전체에는 모든 영혼을 위하여 귀한 교훈이 담겨져 있다”(원고 110. 1903). 바울 스스로도 에베소서의 수신자로 에베소에 있는 이들 뿐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 안의 신실한 자들” 모두를 지목합니다(1:1). 


그런데 우리는 ‘교회론’ ‘교리적인 부분’이라고 짧게 정리해 놓은 말에 갇혀 에베소서 1장을 너무 작은 틀 속에서 이해하고 있는 건 아닌지 생각해 봅니다. 에베소서를 묵상하며 우리의 이해와 체험 속에서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경험하면 좋겠습니다. 그분이 우리에게 베푸신 은혜를 더 깊이 이해하며, 하나님을 찬양할 주제가 더 커지고 있는지 숙고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드디어 헬라어로 성경 읽은 이야기를 해 볼까요. 에베소서 1:3-14에서 바울은 하나님에 대해 끝없이 이야기하는 그 긴 길이로 독자들을 압도하면서 자신이 표현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으로 하나님을 설명합니다. 한역본에는 여러 문장으로 쪼개 있는 이 부분(3-14절)은 사실상 헬라어 원문에서는 한 문장에 모두 들어 있습니다. 한국어에는 없는 ‘관계대명사’ 때문에 가능합니다. 이미 언급된 어떤 대상을 다시 끄집어내어 더 자세히 설명하는 구조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런 방식으로 처음에는 “아버지 하나님은 어떤 분이시며 우리에게 어떻게 하시는가 하면…”하고 설명하고(3-6절),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하고 진술하며(7-13절 전반), “그리고 그 성령은” 어떤 분이신지를 기술합니다(13절 후반-14절).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와 같은 정해진 형식으로 표현하지는 않았지만, 삼위 하나님의 개체성과 다른 역할을 분명히 제시해 주는 부분입니다. 그러나 교리적으로 이해시키거나 가장 간단하게 요약하고자 하는 의도보다도, 찬양받기에 합당하시며 우리에게 복 주시는 삼위 하나님을 좀 더 잘 일러주고 싶은 바울의 마음이 돋보입니다.


사실 이런 장문형 문체는 신약성경이 적히기 이전인 고전 헬라어 시기에 많이 목격됩니다. 가령 소크라테스의 철학적인 말들을 그 복잡한 구조를 이용해 장문(長文)으로 기술한 플라톤의 글을 헬라어 원문으로 보고 있자면 눈이 뱅글뱅글 돌아가지요. 헬라어 문법을 숙달한 뒤에도, 그 언어의 쓰임에 온전히 담겨 있어야만 제대로 읽어낼 수 있다 하겠습니다. 


그러나 헬레니즘이 넓은 지역으로 퍼지게 되면서 헬라어를 그처럼 깊이 이해하지 않는 외국인들이 세계 공용어로서 그 언어를 사용하게 된 신약 시대의 코이네 헬라어에서는 이런 특징이 좀 옅어집니다. 고전 헬라어처럼 기교 있는 언변술이라는 느낌보다, 코이네 헬라어는 뜻을 간단명료하게 전달하고자 하는 실용어라는 인상을 주지요. 


단어의 의미들이 달라진 것은 둘째 치고, 문법이 간단해지고, 문장이 짧고 구조가 단순해졌습니다. 평범하게, 쉽게, 보통 사용할 수 있는 수준의 언어가 되었기에 그 이름도 코이네 (κοινή) 즉 보편의(common) 헬라어라 불리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코이네 헬라어의 특징은 사복음서를 비롯해 신약 여러 군데에서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의 글은 좀 더 복잡한 형태입니다. 물론 바울도 간단히 진술할 때가 있지만, 어떤 때는 복잡성과 길이를 마다하지 않습니다. 3-14절 이후로도 15-23절을 한 문장으로 말하고 있으니, 바울이 한 주제를 가지고 설명하고 싶은 내용이 얼마나 풍성한지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이 기록한 이 긴 문장 가운데 있는 8-9절을 주목해 보겠습니다. “이는 그가 모든 지혜와 총명으로 우리에게 넘치게 하사 그 뜻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리셨으니” 이 구절에서 “우리에게 넘치게 하”신 것은 단연 그 앞에 나오는 “모든 지혜와 총명”인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원문에서는 그가 넘치게 하시는 것은 7절에 이미 언급된 “그분의 은혜”이며, 바로 지혜와 총명은 우리에게 풍성한 은혜가 주어지는 하나의 방면이 됩니다. 


우리가 이해하고 깨닫는 것은 그리스도의 은혜가 있기에 가능하다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세상 사물의 이치를 깨달을 수 있는 기본적인 지력이 하나님의 은혜에서 비롯되며, 교만한 자에게는 감추시고 어린아이와 같이 겸손한 자들에게 하늘의 신비를 알려주시는 것 또한 그분의 풍성한 은혜의 선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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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절은 은혜로이 얻은 이해력으로 “그 뜻의 비밀을” 알게 하신다고 말합니다. 원문에서 “비밀”이라고 번역된 말은 최근 한국에서 영어 발음을 그대로 표기하여 흔히 쓰이는 ‘미스터리 (mystery)’와 같은 뜻, 같은 발음의 헬라어 단어 μυστήριον(미스터리온) 입니다. 이 단어는 ‘비밀’ ‘신비’ 등을 의미하는데, 한역판에서의 ‘비밀’이라는 단어 사용으로 인해 진리가 ‘한번 알려지면 더이상 알아낼 것이 없는, 경계선이 명확한 소식’이라는 인상을 받지는 않으면 좋겠습니다. 이 부분을 ‘신비’로 번역했다고 한다면 어떨까요? 무엇이 신비롭다 하면, 그것은 한번 안다고 다 아는 것이 아니라 더 알아갈 것이 있다는 궁금증을 자아냅니다.


에베소서뿐 아니라 성경 전체를 통해 하나님과 그분의 말씀은 감춰질 때가 있기에 비밀이기도 하지만, 은혜로이 주시는 지력과 계시를 통해 항상 더 많이 알며 경험해 갈 수 있는 신비이기도 합니다. 에베소서 1장에서 17-19절을 주목해 보면, 바울이 기도하며 성도들이 알아갈 것들을 “풍성”하고 “크심”이라고 말합니다. 알아갈 것들의 경계선이 우리의 생각보다 매우 넓은 것이지요. 


3장에서는 그리스도의 사랑이 “지식에 넘치”지만, “그 넓이와 길이와 높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갈 것으로 묘사됩니다(3:18-19). 또한 하나님은 “우리의 온갖 구하는 것이나 생각하는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시는 분이라며(3:20), 에베소서는 재차 하나님께서 우리의 이해를 넘어 웅대하신 분임을 묵상하게 합니다.


교리는 믿는 바에 대한 틀을 제시해 주지만, 그것이 하나님과의 교제와 말씀에 대한 폭넓은 이해에 한계를 짓지 않도록 조심해야겠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다양한 면모를 계속 발견해가고, 말씀이라는 지극히 큰 보물상자에서 다양한 보물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토록 이 세대가 추구하는 다양성이 바로 하나님 그분 자신과 말씀 안에서 발견됩니다. 


화잇 부인은 이렇게 기록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한 가지 약속조차도 그 부요함과 광대함을 모두 다 이해하기란 불가능하다. 어떤 사람은 이런 관점에서 영광을 포착하고, 다른 사람은 저런 관점에서 아름다움과 은총을 포착하며, 영혼은 하늘빛으로 충만해진다. 우리가 모든 영광을 보게 된다면, 영혼은 기진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현재 우리가 갖고 있는 것보다도 훨씬 위대한 계시들을 하나님의 풍부한 약속들로부터 얻을 수 있다” (TM,2 111)


여기서 주의해 기억할 것은 이 다양성이 현대 세상에서 주창하는 상대주의적 다양성과는 다르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고, 아무래도 좋고, 사람이 하는 모든 것은 좋은 것’이라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말씀의 가르침은 무지갯빛처럼 다양성을 지니는 한편, 하나님의 세계와 사단의 세계를 확연히 구분하는 이분법적 성질도 가집니다. 


하나님의 것과 하나님께 속한 것이 있는 반면, 사단의 것과 사단에게 속한 것이 있으며 그 두 방면은 상존하지 않고 대립하는 관계에 놓여 있습니다(6:10-18 참조). 옳고 그름이 명확한 절대성이 있기에 사도 바울은 그 신비에 대한 깨달음이 그리스도의 은혜 안에서 일어나야 하며 (1:8-9), 지혜와 계시의 영을 받아 밝혀진 마음의 눈, 즉 분별력을 가져야 한다(1:17-18)고 역설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대해 갖는 이해는 어린 자녀가 그들의 인간 부모에 대해 갖는 환상처럼 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교리적 진술을 받아들이는 것을 믿음이라고 생각한다면 그 믿음은 커지기보다 깨어지기가 쉽습니다. 교회의 관습을 따르거나 교인들과 모이는 것을 믿음 생활의 토대로 삼는다면, 그 신앙심은 교회의 상황이나 관계에 문제가 생길 때 쉽게 흔들릴 수 있습니다. 에베소서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께 한계가 있어서가 아니라, 우리의 한계로 인해 하나님을 바르게 보지 못하고 있는 현실을 깨닫습니다. 


“우리는 날마다 주님의 임재의 빛 가운데로 행해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영적 조명의 순간적 섬광으로만 만족하고 있지 않습니까?” (TM,2 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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